인천 출신. 호는 검여(劍如)·소완재주인(蘇阮齋主人)·시계외사(柴溪外史)·불함도인(不咸道人)·몽학선관주인(夢鶴仙館主人).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37년 명륜전문학원을 졸업한 뒤 북경(北京)에 가서 서화 및 금석학을 배웠다.
1946년 귀국한 뒤 인천시립박물관장·인천시립도서관장 등을 역임하고, 인천교육대학 강사로 활동하다가, 1962년서울 관훈동에 검여서원(劍如書院)을 열어 서예연구와 후학지도에 힘썼으며, 홍익대학교 등에 출강하였다. 1968년 뇌출혈로 인한 오른쪽 반신마비를 극복하고 왼손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인간승리의 극적인 일화를 남겼다.
1953년 제2회국전에 입선, 제4회에 특선하고, 제5·6회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이래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9년 제1회개인전을 비롯한 6회의 개인전과 한국서예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현대서예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글씨는 전·예·해·행서에 두루 능하였고, 초서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으며, 전각과 그림에도 능하였다.
전·예서는 등석여(鄧石如, 1743∼1805 : 중국 청나라의 서도가)를 토대로 하였으며, 해·행서는 처음에는 황정견(黃庭堅)과 유용(劉鏞)을 섭렵하다가 차차 북위서(北魏書)를 가미하여 웅혼(雄渾)한 기운이 담긴 서풍을 이루었다. 금석문으로 경기도 안산시의 「성호이익비명(星湖李瀷碑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