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간,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전적(典籍)·정언(正言)·문학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왕이 강화로 피란가자 어사로서 호남에 내려가 식량 조달에 공을 크게 세웠다. 그 뒤 5, 6년 간은 양사의 지평(持平)·헌납(獻納)·사간을, 세자시강원에서 사서·보덕 등을, 홍문관에서는 수찬(修撰)·응교(應敎) 등을 여러 차례 거쳤다.
교리 때에는 경천(敬天)·휼민(恤民)·납간(納諫)·용인(用人)·숭검(崇儉)·돈종(敦宗)·진학(進學)·형내(刑內) 등 8조를 올려, 광해군 때의 해로운 풍습의 잔해를 쇄신하도록 주장해 왕이 가납(嘉納)하였다. 이어서 검상을 거쳐 사인·형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청주목사·응교·첨지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병방승지로 호종해 공을 세워 환도 이후 도승지로 승격하였다. 곧이어 병조판서 겸 비변사유사 및 군공청당상(軍功廳堂上)을 맡아 전국 장사(將士)들의 공죄(功罪)를 잘 조사한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다.
1638년에는 왜인들이 호란을 빙자해 침입할 기세를 보이므로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임기응변으로 일을 잘 처리하였다. 뒤에 병조판서가 되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나갔으나, 병으로 물러났다가 16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 때에는 홍무적(洪茂績)·유백증(兪伯曾) 등의 질시와 배척을 받았으나 왕과 다른 대간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왜인들의 간교함과 민막(民瘼)의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이듬해 조민(趙珉)이라는 인물을 잘못 기용한 일로 유배되었다.
1646년 지중추부사로 시관이 되어 국왕의 휘(諱)에 저촉되게 잘못 제출해, 이식(李植)과 함께 삭출(削黜)되어 강교(江郊)에 은거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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