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 출신, 1909년 평양의 박태은(朴泰殷) 집에서 이재명(李在明)·김정익(金貞益)·전태선(全泰善) 등과 함께 매국적당들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이완용·이용구(李容九)를 동시에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동수는 이재명·김병록(金丙錄) 등과 함께 이완용을, 김정익·조창호(趙昌鎬)는 이용구를 맡기로 하고 상경하였다. 그 해 12월 종현(鍾峴: 북달재) 천주교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이재명의 주동으로 자격(刺擊)하였다.
사건 직후 동지들은 거의 잡혔으나 자신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였고 궐석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 뒤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1919년 4월에는 한성국민대회(漢城國民大會) 13도대표로 활동하였으며, 상해에 건너가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4년 이완용저격사건 이후 15년 만에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