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신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대사헌,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성량(聖良)
  • 시호효헌(孝憲)
인물/전통 인물
  • 본관전주(全州)
  • 사망 연도1802년(순조 2)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지의금부사|대사헌|병조판서|한성부판윤
  • 출생 연도1742년(영조 18)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재호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헌,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량(聖良).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3대손이며, 이익수(李益壽)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도선(李道善)이고, 아버지는 이시덕(李時德)이며, 어머니는 홍정명(洪廷命)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6년(영조 4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74년(영조 50) 등준시(登俊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68년(영조 44) 홍문관교리에 이어 부교리·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73년(영조 49) 승정원승지·수원부사를 거쳐 다음 해 대사간이 되었다.

이득신이 올린 상소문이 민심을 광혹하게 했다는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탄핵으로, 1781년(정조 5)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춘천부사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상주목사가 승려를 동원해 화양동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수리하자 관할자로서 지방 유생들로부터 책임을 추궁받기도 하였다.

1788년(정조 12) 대사헌이 되고, 다음 해 희천군수로 나가 치적을 쌓아, 암행어사의 보고로 정조로부터 말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1793년(정조 17) 형조판서가 되었을 때 수감중 병에 걸려 고생하는 전국의 죄수에게 약을 주어 치유시켰다.

2년 뒤 임금의 모후 혜경궁(惠慶宮: 敬懿王后)을 추존하는 경사가 있자 행부사직으로 가자(加資: 품계가 오름)의 은전을 받았다. 그 뒤 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797년(정조 21)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호남에 4만석을 풀어 기민(飢民)을 구제했으며, 이 지방의 사치를 엄단할 것을 상소하였다.

2년 뒤 한성부판윤이 되고 1801년(순조 1) 정조의 능을 조성하는 산릉제조(山陵提調)로서 공로가 있어 가자되었다. 그 뒤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02년(순조 2) 병조판서로 있다가 죽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정조실록(正祖實錄)』

  • - 『순조실록(純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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