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군직(君直), 호는 고재(顧齋). 아버지는 통덕랑 이융일(李隆逸)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김초(金礎)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이현일(李玄逸)에게 학문을 익히면서 권해(權瑎)·손덕승(孫德升) 등 당시의 대유들과 더불어 고경(古經)을 강론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와 형의 권유로 과장(科場)에 출입하여 향시에는 거듭 합격하였으나 매번 대과에 가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마침내 세무(世務)에 뜻을 버리고 안동 묵동(墨洞)에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거기에 기거하면서 때때로 산수도 즐기면서 독서로 지냈다. 만년에 이르러 날로 쇠퇴하여가는 안동의 학풍을 다시 진작시키기 위하여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의 주선으로 훈적지임(訓迪之任)을 맡아 학령(學令)을 마련해서 흥학(興學)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1734년에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만은 예학에 밝아 예(禮)에 있어 의문(儀文)이나 제도에 급급함을 물리치고, 고의(古義)를 준수하면서도 시의에 맞는 새로운 예론을 세워 인근의 수용에 응하여 이름을 날렸다.
특히, 관방(關防)과 군무(軍務)에도 남다른 식견을 가져 임진·병자 양란 때 탄금대(彈琴臺)와 남한산성 등에서 패전하게 된 까닭을 명쾌히 지적하기도 하였으며, 또 죽령과 조령에다 산성을 쌓고 진영(鎭營)을 세워 병농(兵農)을 겸하게 하면 국방에 더욱 실익이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고재문집(顧齋文集)』 1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