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근휴(謹休), 호는 신암(愼庵)·암후(巖后). 아버지는 통덕랑 이휘운(李彙運)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진사 유회문(柳晦文)의 딸이다. 외숙 유치명(柳致明)에게 글을 배웠다.
1865년(고종 2) 직지사(直指使) 박규수(朴珪壽)의 추천으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영리(榮利)의 뜻을 버리고 경전과 『주서절요(朱書節要)』를 깊이 연구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당시의 석학 이돈우(李敦禹)·강건(姜楗)·윤최식(尹最植) 등과 교의를 맺고 그들과 학문에 대한 많은 서신을 남겼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 간에 있었던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을 연구, 발전시켰다.
또, 『퇴계전서(退溪全書)』 중에서 긴요한 종지(宗旨)만을 발췌하여 「계서약선(溪書約選)」을 편집하였고, 고증학에도 밝아 용학의목(庸學疑目)인 「암후유기(巖后類記)」를 남겼다. 저서로는 『신암문집(愼庵文集)』 10권 5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