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사원(士原), 호는 한재(漢齋). 할아버지는 이색(李穡)이며, 아버지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이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5년(우왕 11) 문과에 합격해, 성균직학(成均直學)·사재소감(司宰少監)·내서사인(內書舍人)·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예문관직제학을 지냈다. 1406년(태종 6) 사헌부집의로 있으면서 사송(司訟)을 지체한 죄로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그 뒤 지영천군사(知永川郡事)·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성균관대사성·좌사간·예조참의·경승부윤(敬承府尹)·충청도관찰사·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차례로 지냈다. 1421년(세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참판·경기도관찰사·공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다. 1425년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와 병조 판서를 지냈다.
1427년 좌빈객(左賓客)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고, 그 뒤 의정부참찬 겸 대사헌·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429년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다가, 다음 해 돌아와서 의정부참찬이 된 뒤 성균관대사성·판한성부사·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1437년 예문관대제학 겸 판이조사(藝文館大提學兼判吏曹事)가 되니 판이조사를 겸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우찬성 겸 판이조사·판의주목사·좌찬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부인 이씨가 심한 질투로 종을 죽인 사건으로 파면되어 황해도 우봉현(牛峰縣)으로 쫓겨났다가, 방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개성부에서 70세로 죽었다. 글씨와 시문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