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함경남도 정평 출생. 1937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사범학교 단기강습과를 거쳐 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39년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데이코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1943년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중인 1943년 일본 도쿄 창원회전과 1946년 도쿄 제일미술협회전에 참여하였다.
1946년 귀국하여 함흥(咸興)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북조선미술동맹 함경남도위원회 서기장에 피선되어 활동하다가 6·25때 북진했던 국군을 따라 남한으로 넘어왔다. 월남 후 대구에서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들어가 그린 대작 「야전도(夜戰圖)」가 1953년 제6회 종군화가단전쟁미술전에서 육군총무과장상을 받았다.
1944년 이전에 졸업, 수료, 재학중이었던 데이코쿠미술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1955년 백우회(白友會)를 발족할 때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폐허의 서울」(1952년)을 비롯한 종군 기록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특히 1954년에 그린 대작 「6·25 동란」은 피난민 행렬의 비극적 상황을 주제로 삼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 무렵부터 표현 형식이 그간의 재현적 사실주의에서 벗어난 조형적 변용과 구성적인 화면 창조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1957∼1960년에는 완전 추상 작업으로 「역(歷)」, 「적(蹟)」 등을 연작하였다.
그러나 1953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 및 특선한 작품들은 사실주의 정신의 서정적 표현으로 일괄된 여인상, 나부(裸婦), 자연 풍경 및 생활 주변의 정물화였다. 국전에서는 1970년 추천 작가, 1975년 이후 초대 작가가 되어 1981년의 마지막 제30회전 때까지 해마다 참가하는 동안 심사위원도 역임하였다.
1987년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의 찬미를 서사시적인 화면 전개로 연작한 대작 「민족의 향(香)」은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정신적 작품 의욕을 집중시켜 남긴 역작이다. 주제 구성과 필력에서 심혈을 기울인 6폭의 연작에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2점), ‘고려’, ‘이조’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리고 각 시대의 상징적 유적과 유물인 고분 벽화, 금관, 불상, 석탑, 토기, 청자, 백자, 그밖에 궁궐 건물 등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극적 구성에 등장시켰다. 그래서 이를 ‘민족의 향기’로 집약시켰다. 뒤이어 발표한 1988년의 「농악」 연작도 같은 성격으로 민족적 전통문화 찬미의 주제 의식을 담은 것이었다.
1951년 종군화가단전 참모총장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에는 강원문화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