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두 ()

산업
인물
일제강점기 평양 최초의 고무공장을 설립한 기업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지
평안남도 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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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평양 최초의 고무공장을 설립한 기업인.
개설

평안남도 덕천 출생. 소년시절부터 평양에 나와 병원의 잡역부로 종사하였는데, 평양의 갑부인 최형준(崔亨俊)의 아들 최규봉(崔奎鳳)이 신병으로 그가 일하고 있는 병원에 오래 입원한 일이 있었다. 그 뒤 서로 친하게 되어 자주 만나 친교가 깊어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본인 경영의 나이토쿠상점[內德商店]에서 고무단화가 잘 팔리는 것을 보고 규봉의 지원을 받아 일본 제조회사에 고무화를 주문하였다. 처음에는 시험삼아 수십 켤레씩 우편소포로 주문해 이를 들고 다니며 팔았는데, 의외로 잘 팔려 곧 상점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고무화전문점을 열었다.

이들이 고무화전문점을 시작한지 불과 1, 2년에 그들은 적지 않은 밑천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고무화 정도라면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공장을 건립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거래처이던 고무공장에 수개월 머무르면서 고무화제조의 공정과 고무배합기술을 배웠다.

따라서,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고무배합기술자가 되었다. 귀국시 기계와 원료를 구입하여 평양 교구동(橋口洞)에 공장을 지었다.

이 평양 최초의 고무공장은 5인 동업이었는데, 그의 동업자로는 최씨 부자와 최창환(崔昌煥)·이성근(李成根)이었다. 자본의 약 반은 최형준이 담당하고 그는 공장의 기술책임을 전담하였다.

한편, 일본 상점 주인 나이토쿠도 서둘러 공장건립을 추진하였다. 평양에는 이 고무공장과 일본인이 세운 고무공장이 서로 전후해서 건립되었으며, 위치도 교구동 근교였다. 이들 공장이 가동된 것은 1919년경이다.

두 공장이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자 한국인이 경영하는 고무공장에서는 기술의 혁신을 꾀하였다. 특히, 이병두가 참여한 고무공업사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920년 봄에 제품의 모형을 우리의 기호에 맞도록 창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무신을 한국인 전래의 신발 모양으로 개량, 개조할 것을 창안하여, 남자 고무신은 재래의 짚신을 본떴고, 여자 고무신은 코신을 본떠 제조, 시판하게 되자 의외로 대중의 큰 인기를 얻어 대성공하게 되었고, 1922년경에는 공장을 확장하고 자본을 증자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83)
『한국자본주의성립사론』(조기준, 대왕사, 1982)
『한국경영사연구』(고승제, 한국능률협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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