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 1942년 5월 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相敎) 등 26명의 대구상업학교 독립운동 학생조직인 태극단을 조직하였다. 태극단 단장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기에 앞서 조직확대의 필요성을 느껴 각 학교의 동지를 규합,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학술연구토론회 및 각종 체육집회 등을 열었다.
연구토론의 주제는 주로 정치·경제면의 독립을 목표로 진행되었으며, 궁극의 독립달성을 위하여 군사학연구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극단의 활동이 이듬해 5월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전단원이 잡혔다.
단기 5년, 장기 10년의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 직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옥독(獄毒)으로 순국하였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