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부(鷄林府) 출신으로 1351년(충정 3) 8월에 밀직부사가 되고, 이듬해인 1352년(공민 1) 윤3월에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0월에 동지밀직사사에 승진되고 12월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거쳐 1361년 11월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남행(南幸)하게 되자 양광도도순문 겸 병마사(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가 되어 이를 막아 싸웠다.
1363년 3월 흥왕사(興王寺)의 변(變) 때 최영(崔瑩)과 함께 이를 토벌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왕이 안동으로 남행하였을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다시 첨병보좌공신(僉兵補佐功臣) 1등에 봉해지고, 같은 해 11월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기해격주홍적공신(己亥擊走紅賊功臣) 1등에 봉해지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1368년 11월 찬성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하정(賀正)하니 원나라에서 태위감대경(大尉監大卿)을 제수하였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죽은 뒤에 공민왕이 정릉(正陵: 노국대장공주의 능)을 크게 일으키고 운암사(雲庵寺)를 지어 원찰(願刹)로 삼아 매달 30석의 쌀과 기타 경비를 무제한 지급하므로 재신(宰臣)으로서 이를 저지하였다.
원나라의 한림학사승지 기전룡(奇田龍)의 첩과 사통(私通)하여 헌사(憲司)의 탄핵으로 파면되었으나, 왕이 그 탄핵한 장(狀)을 돌리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하였으며, 1379년(우왕 5) 죽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