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후기 병조참판, 한성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순조 등극 후 좌승지·우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병마절도사·경기도수군절도사·영변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내직으로 우포도대장·금군별장·훈국중군(訓局中軍)·총융사·한성좌우윤·어영대장·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811년 평안병사가 되었을 때, 형이 황주목사로 부임하자 불편함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 해 겨울에 홍경래(洪景來)가 청북(淸北)에서 난을 일으키자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에 임명되었다. 명을 받은 뒤에 곧바로 군영을 열고 묘당(廟堂: 의정부의 다른 이름)의 의론을 써서 부수(副帥) 박기풍(朴基豊)·유후원(柳厚源)을 선봉으로 삼았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총괄했는데, 그 때 적이 정주성에 머무르면서 성을 굳게 지켜 쉽게 함락되지 않으므로 이것을 근심해 여러 번 단기(單騎)로 적에 가기를 청하였다.
군영에서 5개월을 보내면서 잠시도 군복을 벗지 않았고 여러 차례 글을 지어 서민(西民)에게 충역화복(忠逆禍福)을 깨우치고,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관(棺)이 도성문을 지날 때는 손수 제문을 지었다 한다. 정주성 함락의 공으로 논공할 때 원훈(元勳: 공훈이 으뜸됨)으로 봉해졌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812년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금위대장을 역임하였다. 1813년 지중추부사로 지의금부사·지훈련원사를 겸했고, 1814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독서와 시를 즐겼고, 글씨를 잘 썼으며, 활을 잘 쏘았다 한다. 시호는 숙렬(肅烈)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서행일기(西行日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