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이정중(李正中)이다.
1781년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지내고, 1787년(정조 11)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88년 대사간 · 형조참의를 거쳤다.
이듬해에 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의 추천으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흉역(凶逆) 조시위(趙時偉)의 친사돈이라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1794년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있을 때 정주의 신도(薪島)에 표류해 온 중국 사람에게 사정을 물어 보는 과정에서 실수가 많았다고 하여 징계를 받았다.
1796년 대사간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1797년에는 밀양부사(密陽府使)로서 영운도차사원(領運都差使員)의 임무를 맡았으나 영남(嶺南) 후조창(後漕倉)의 조선(漕船) 6척을 침몰하게 한 죄로 징계를 받았다.
1798년 아경(亞卿: 참판 · 우윤 등 경의 다음 관직)을 가망(加望: 삼망 후보자에 해당되는 관직보다 낮은 품계를 가진 자가 후보로 등록되는 것)받고 한성부우윤 ·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