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아버지는 이순좌(李舜佐)이다.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부수찬에 부임하였으나, 정조가 즉위한 해에 척신(戚臣) 김구주(金龜柱)를 토죄하라는 대사간 유당(柳戇)의 상소가 너무 완만하다고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하였다.
그 뒤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1782년 중신 김종수(金鍾秀)를 논핵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1783년 부수찬이 된 뒤 1785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잠시 나갔다가 1786년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교체되었다.
1787년에는 동래부사 시절의 청렴한 명성이 널리 알려져,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부임하여 강계 백성의 인삼으로 말미암은 폐해를 시정하게 하였다. 1790년 의주부윤(義州府尹)·대사간을 거쳐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였으나 종묘의 헌관(獻官)으로서 엄숙하고 조심해야 할 자리에서 술을 지나치게 마셨던 일 때문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