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제수(濟秀). 본관은 고부(古阜). 제주도 대정 출신. 이시준(李時俊)과 송씨부인 사이의 둘째아들이다. 관노(官奴) 또는 마부 신분으로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싸움과 장난을 잘하였고, 칼과 활 등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는 계속되는 흉년과 경래관(京來官)의 탐학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정부에서 파견된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의 남세(濫稅)와 이와 결탁한 천주교도의 작폐가 심각하였다. 1901년 대정군 인성리에서 일어난 군민과 천주교도의 충돌사건이 민란의 발단이 되었다.
군민들은 봉세관의 토색과 천주교도의 잔인성을 성토하고 이의 광정(匡正)을 목사에게 호소하려 하였다. 이 때 자진 참가하여 민군(民軍)의 주장(主將)이 되어 천주교도의 응징을 적극 촉진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대정군민의 궐기에서 3개 읍민의 궐기대회로 확산되어 제주성을 둘러싼 민군과 주(州) 성내의 천주교도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주 성내에서는 주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반목이 생기고 부녀자들의 천주교도군에 대한 반대궐기가 일어났는가 하면, 주 성밖에서는 은신해 있던 천주교도들이 민군측에 의하여 살해되는 사태가 나타났으며 입성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정부에서는 진압군을 파견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프랑스함대와 일본군함까지 출동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결국, 정부진압군에 의하여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되고, 주민들은 사후대책을 보장받음으로써 난은 진압되었다. 한편, 평리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