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회부(晦敷), 호는 남계(柟溪). 아버지는 장사랑 이진(李縉)이며, 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氏)로 박양좌(朴良佐)의 딸이다.
일찍부터 과업(科業)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고향 의령을 떠나 합천 숭산의 외가로 피란하여서 외삼촌 박이문(朴而文)과 박이장(朴而章) 형제에게 학문을 익히다가 사양(泗陽)에서 강학하고 있던 정구(鄭逑)를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또, 김굉필(金宏弼)이 소요하던 숭산의 한훤당(寒喧堂) 구지(舊址)인 지동암(志同巖)에 소학당(小學堂)을 짓고 내제(內弟)들과 같이 학문을 강마하면서 김굉필의 유풍을 사숙하였다.
굳센 선비의 기개와 청아한 지조가 있어 광해군 때 살제폐모(殺弟廢母)의 변이 있자 분연히 소를 올려 이의 부당함을 간하였다. 1780년(정조 4) 숭산 회산서원(會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남계문집(柟溪文集)』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