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자안(子安). 호조참판 이세응(李世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의진(李宜振)이고, 아버지는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성주목사(星州牧使)로서 난의 토평(討平)에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으로 인평군(仁平君)에 봉해진 이보혁(李普赫)이며, 어머니는 홍주화(洪胄華)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자 영조가 특별히 훈신(勳臣)의 아들이 입격했다고 기뻐하면서 아버지의 공훈을 가슴에 새기라고 당부하였다. 1741년 설서(說書)로 처음 부임하여, 그 뒤 정언·지평·문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744년 정언섭(鄭彦燮)의 허물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으나, 1746년 지평으로 복직되었다.
이어 교리·시독관·부수찬·겸필선·수찬 등을 역임하다가 1752년에 임금의 부름을 어겼다는 죄명으로 한광조(韓光肇)·임상원(林象元) 등과 함께 충청도 연해(沿海)지방으로 잠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1753년 필선으로 복직하고 겸문학과 부교리를 역임하였으며, 1754년 교리와 승지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