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의령 출신. 본관은 전의(全義), 초명은 명로(鳴魯), 자는 도경(道卿), 호는 학수(鶴叟)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무장의 자질이 뛰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의 비보와 단발령 공포의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이청로는 안동과 진주에서의 의병봉기 소식을 듣고 거의하였다.
이청로는 의령 사민들과 1896년 1월 11일 진주의병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진주에 가기도 하였다. 진주의병장 노응규는 이청로에게 의병에 참여해 줄 것과 군수금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이청로는 의병 100여 명을 초모하여 의진을 편성하였다.
1896년 2월 15일(양, 3. 28) 의병장에 추대되어 전상무(田相武)와 권은중(權殷中)을 선봉장으로 삼아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청로의병은 곧 함안을 거쳐 2월 21일 창원에 도착하여 군수 김철규(金哲奎)로부터 포군 50여 명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다음날 김해에 도착하였으며, 2월 30일 출동한 일본군 부산지구경비대와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이청로가 총상을 입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수일 후에 의진은 퇴진하여 귀향하고 말았다. 이청로는 이후 8도를 다니면서 각지의 명망지사와 일본을 물리칠 것을 토론하였으며 1916년 향리인 의령군 유곡면에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