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총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조선 전기에, 승헌대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마재(磨齋)
  • 시호문헌(文憲)
  • 종지(淙之)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기묘사화
  • 본관전주(全州)
  • 사망 연도1544년(중종 39)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488년(성종 19)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종호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승헌대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종지(淙之), 호는 마재(磨齋). 아버지는 세조의 아들인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승헌대부(承憲大夫) 숭선부정(嵩善副正)에 봉해졌다.

조광조(趙光祖)와는 도의(道義)로써 교제했고 일찍부터 정주학에 심취하여 『정주봉사(程朱封事)』를 인출(印出)하여 중종에게 바치며 다스림에 허물이 없도록 할 것을 간언하여, 상으로 서적을 하사받았다. 또, 왕에게 표문(表文: 품은 생각을 적어 임금께 올리던 상소문의 일종)을 올려 정치의 잘못을 극론하고 김정(金淨)·박상(朴詳) 등의 방면과 여악(女樂)을 혁파할 것 등을 주청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인 좌당(坐黨)에 붙어 정치에 관여했다가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520년(중종 15) 김덕순(金德純)의 장인이었던 그는 덕순의 소재에 대하여 심문을 받아 매를 맞고 영해로 유배되어 15년 동안 생활하다가 개령(開寧)으로 옮겨졌다. 1534년(중종 29)에 풀려나 1538년(중종 33)에 겨우 복직되었다.

그의 순수하고 바른 학문과 충효의 절의는 당시 유림들 간에 널리 추앙되었다. 이이(李珥)가 쓴 묘지(墓誌)를 보면 “조광조와는 서로 존경하는 벗이었다. 천성과 자질이 청수하고 아름다웠고 기량이 숙성했으며, 마음을 바른 학문에 두었고 사람을 대할 때는 공경을 다했으며 갑작스런 일을 당하더라도 말에 변함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평생 큰 뜻은 오직 충효를 지키는 데 있었고, 검소하며 깨끗하고 청렴한 선비처럼 행세하였다. 육예(六藝)에 정통했는데, 특히 음악과 산수에는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숙종 때 와서 바른 학문과 충효가 이미 유현(儒賢: 유교에 대하여 조예가 깊고 행실이 바른 사람)의 정론(正論)하는 바가 있고, 또 조광조와 함께 사화에 화를 입었던 것으로 숭선군(嵩善君)이 추증되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 - 『중종실록(中宗實錄)』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인물고(人物考)』

  • - 『대동야승(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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