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승지, 부제조,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1년(영조 7)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덕수(德水, 지금의 황해북도 개풍)
주요 관직
도승지|승지|부제조|대사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승지, 부제조,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희능(熙能). 이계(李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담(李喜聃)이고, 아버지는 이협(李峽)이며, 어머니는 조태과(趙泰果)의 딸이다. 이우(李堣)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생원을 거쳐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763년 부교리에 처음 임명된 뒤 정언 · 부수찬 · 수찬 · 헌납 · 지평을 역임하였다. 1765년 굶주린 백성이 가장 많은 광주부(廣州府)에 특별히 안집어사(安集御史)로 파견되어 덕의(德意)를 선유(宣諭)하고 유민(流民)들을 안집시키고 돌아와 교리 · 부교리를 지냈다.

1771년(영조 47)에는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1773년 승지를 거쳐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1775년 도승지 · 승지 · 부제조 ·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홍인한(洪麟漢) 등과 세손(世孫: 正祖)의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하고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洪國榮)을 배척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려고 했던 정후겸(鄭厚謙)이 유배, 사사(賜死)되자 이에 연좌되어 평소에 정후겸을 아비처럼 따르고 섬기었다는 탄핵을 받고 명천부(明川府)에 유배되었다.

1784년(정조 8) 대사면령에 의하여 직첩(職牒: 관직 임명사령장)이 환급(還給)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