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촬영기사로 촬영, 현상, 녹음 등의 기술 분야를 개척한 영화인. 영화제작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7세 때 영화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 있는 제국키네마 계통의 고사카촬영소(小坂撮影所)에서 촬영과 현상기술을 배웠다. 1920년 초에 귀국한 그는 마침 연쇄활동사진극의 제작을 계획중이던 문예단(文藝團)의 이기세(李基世)와 만나 <지기 知己>를 촬영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촬영기사가 되었다.
이어서 연쇄활동극 <황혼>·<장한몽> 등을 촬영하였고, 1924년 단성사 촬영부의 전속기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체육기록영화인 <전조선여자올림픽대회>를 촬영하였고, 순전히 한국인에 의해서 제작된 <장화홍련전>의 촬영·현상·편집을 맡음으로써 영화기술 분야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는 촬영 분야뿐만 아니라 각색·감독·제작 등 영화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1925년이구영(李龜永)과 함께 고려영화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쌍옥루 雙玉淚>를 각색, 촬영하였고, 1926년 반도키네마를 창립하여 <멍텅구리>를 각색·감독·촬영하였다. 1927년 극동키네마를 설립하여 <낙원을 찾는 무리들>을 촬영하였고, <낙양의 길>에서는 각색·감독·촬영을 맡았다.
1920년대에 미국에서 제작된 발성영화가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되자, 그는 토키장치의 연구에 몰두하여 연구를 시작한 지 7년 만인 1933년 7월에 드디어 PKR발성장치 개발에 성공하였다. 1935년 이 장치에 의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완성됨으로써 한국영화는 새로운 발성영화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영화촬영 분야에서 활약하였고, 6·25전쟁 때에는 해군촬영대 소속으로 해군기록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는 초창기 한국의 영화기술 분야에서 일본인을 제치고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선구자이며, 녹음장치의 개발자이자 감독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 『한국영화총서』(한국영화진흥조합, 1972)
- 『한국영화발달사』(유현목, 한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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