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천(寧川). 자는 형재(馨哉), 호는 대명거사(大明居士). 아버지는 한성판관(漢城判官) 이명세(李名世)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며, 영교위(營校尉)를 거쳐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호가(扈駕)에 뽑혀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 때 강화가 성립되자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1631년 청나라가 가도(椵島)를 침범하고 군선 및 식량을 비롯하여 군수품을 요구하자 자신이 선봉장이 되어 청을 칠 계획을 구상한 소를 올리는 한편, 청의 재침략을 염려하여 방어태세 완비와 관서지방 변경지역의 주민 확보 및 안정을 위한 시책을 건의하는 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특히, 안주와 의주를 연결하는 최북단 국경방위선을 형성하기를 주장하였다. 1632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직되었으며, 곧 덕만보권관(德萬堡權官)에 제수되었다.
1633년 관서지방의 직관(直官)으로 부임하여 그곳의 피폐한 실정과 기근·한해로 죽어가는 국민들의 고통을 절감하는 근본적인 구휼정책에 대하여 첩(牒)을 올리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에 은거하여 지냈다. 저서로는 『대명거사유고(大明居士遺稿)』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