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6년(선조 9)에 감사 김계휘(金繼輝) 등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이 창건하여 기자의 영정을 모셨다. 1608년(선조 41)에 ‘인현(仁賢)’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3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홍범당(洪範堂),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문(外門),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었다. 이 서원의 영정 진본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잃어버렸다가 한연희(韓連希)가 입수, 가보로 보관하던 것을 그의 4대손이 인현서원으로 환안하였다.
1723년(경종 3) 한씨(韓氏) 일가들이, 옛날 기자의 후손인 선우량(鮮于諒)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황룡성(黃龍城) 안에 전각을 세우고 영정을 옮겨 봉안하였다.
1725년(영조 1)에는 국왕으로부터 이 전각의 전액(殿額)까지 받았으나 1871년(고종 8) 조령에 의하여 이 서원으로 영정을 옮겼으며, 같은 해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복원여부는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