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제3대 문왕시대에 활동하여, 일본에 대사(大使)로 파견된 771년에는 청수대부(靑綬大夫)에 이르렀지만, 그 뒤의 행적이 불명하여 최종 관작은 알 수 없다.
771년 발해 사신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출발하여 6월 일본 데와국(出羽國)에 도착하였는데, 이 사신단은 인원이 325명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서 모두 17척의 배에 나누어 탔다. 이 사행에는 일본인 나이이우(內雄)가 발해에서 음악을 배우고 돌아간 지 10년이나 지났지만 안부를 알 수 없어 이를 알아보려는 데에도 목적을 두었다.
772년 정월 일만복 등 40명이 일본 수도에 들어가 신년 축하 의례에 참여하고 가져간 물품을 전하였다. 그러나 일본 조정은 발해 국서(國書)의 형식이 전례에 어긋나고, 또 발해 왕실을 천손(天孫)이라 칭하였다고 하여 이들을 꾸짖으면서 물건과 국서를 돌려보냈다.
이에 일만복은 그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 발해 왕을 대신하여 사과하였다. 2월에 이르러 일본은 이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대사인 일만복에게 종삼위(從三位)를 주고 일행에게도 위계를 차등 있게 주었으며, 선물도 발해 왕 및 대사 이하 사신들에게 역시 차등 있게 주었다.
그는 9월에 일본을 출발하였는데, 이 때 일본 조정은 다케후노도리모리(武生鳥守)에게 동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노토국(能登國)에 겨우 표착하여 후쿠라진(福良津)에 안치되었다가 나중에야 발해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