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정안(定安). 초명은 임극인(任克仁). 수상을 지낸 임원후(任元厚)의 넷째아들이며,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恭睿太后)와는 남매가 된다.
문음(門蔭)으로 진출한 뒤 명종 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1187년(명종 17)에 예부시랑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좌승선을 거쳐 참지정사가 되고, 1197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에 이르러 20년 가까운 기간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특히, 세 차례의 지공거와 한 차례의 동지공거를 역임하여 모두 네 차례나 과거를 주관하여 조충(趙沖)·이규보(李奎報)·김창(金敞) 등 많은 재추(宰樞)를 문생으로 두어 큰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또한, “제고(制誥) 16년에 일시의 책문(冊文)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라고 할 만큼 대단한 문장가였으며, ‘가세(家世)·세위(勢位)를 가지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은’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희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숙(良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