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헌회 ()

고산문집
고산문집
유교
인물
조선후기 호조참의,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명로(明老)
고산(鼓山), 희양재(希陽齋)
이칭
전재(全齋)
시호
문경(文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1년(순조 11)
사망 연도
1876년(고종 13)
본관
풍천(豊川: 지금의 황해도 송화)
출생지
미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후기 호조참의,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아버지는 임천모(任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익화(洪益和)의 딸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 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 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연기의 숭덕사(崇德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고산문집(全齋文集)』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전재문집(全齋文集)』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