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압력이 가중되자 백제는 이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중국의 남조(南朝)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472년(개로왕 18)에 처음으로 북중국의 북위(北魏)와의 교섭을 시도하면서 구원병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때 여례(餘禮)와 더불어 외교사절로서 북위에 파견되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백제로서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외교 업무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나 당시 그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백제 지배세력내에서의 위치는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