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백영(伯永). 장설(張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진엽(張震燁)이고, 아버지는 장지복(張至復)이며, 어머니는 신사석(申思奭)의 딸이다.
1786년(정조 10)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1795년에는 장령(掌令)을 지냈다. 1798년에는 현풍 현감에 재직하면서 추곡하우(秋穀夏牛)의 절반은 원곡(元穀)으로 바치고 절반은 돈으로 바꿔 바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성주(星州)의 노장곡면(蘆長谷面) 10리를 현풍으로 옮겨 그 소출을 사용하게 해줄 것도 요구했고, 조창과 왜관 두 곳에 하납(下納)하는 일을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수찬(修撰)의 직에 있으면서 최중규(崔重圭)를 유배하라는 전교의 부당성을 논하다가 왕으로부터 불경(不敬)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1802년에는 전라좌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 수령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이에 대해 조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 곳의 불합리한 실정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해 응교(應敎)에 재직하다가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