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는 장경안(張景安)이다. 이이첨(李爾瞻)의 문객으로, 음관(蔭官) 출신이다.
1597년(선조 30) 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을 거쳐, 이듬해 어사도감의 좌랑을 역임하고 1600년 평안도어사 문홍도(文弘道)의 서계에 따라 승직되었다.
1604년 옥천군수로 부임하여서는 벼슬살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여 자신을 봉양함을 너무나 박하게 하고 마음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데 있으므로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다는 평을 얻는 등 치적이 남다른 데가 있어서 포상을 받았다. 1607년 선산부사로 재직 중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으나 1609년 충주목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1611년 사람이 까다롭고 망령되며 일처리가 전도된 데다가 형벌을 남용하여 인심을 많이 잃어 파직당하였다. 1616년 호조참의로 재등용되어서는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히 하고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할 것을 강조하는 소를 올렸다. 1619년 전주부윤, 1621년 한성부좌윤을 역임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정인홍(鄭仁弘) 등과 결탁하여 그들의 심복노릇을 하면서 폐모론을 주장하였다는 죄로 북도로 유배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