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張保皐)가 동아시아의 국제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9세기 전반기에 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에서 무역업에 종사하였는데, 장영은 특히 장보고의 으뜸가는 심복 부하로서 산동반도 남쪽 끝 문등현(文登縣) 청녕향(淸寧鄕) 적산포(赤山浦)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재당(在唐) 신라인사회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언제부터 당나라에서 무역업에 종사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824년(헌덕왕 16) 무역선을 끌고 일본에 갔다가 당나라로 돌아온 장대사(張大使)가 그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청해진(淸海鎭) 설치 이전 시기부터 활동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이 적산촌의 법화원(法華院)으로 찾아온 840년대 전반경에 이 일대 신라인사회의 치외법권적인 자치기구였던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의 압아(押衙)로서 이를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당나라로부터 평로군절도동십장 겸 등주제군사압아(平盧軍節度同十將兼登州諸軍事押衙)의 직함을 받았다. 또한,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을 임대사(林大使)·왕훈(王訓) 등과 함께 관리하기도 하였다.
당시 적산포는 장보고의 무역선이 중국에 기착하는 첫번째 정박지였고, 이곳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거류하였던만큼 장영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장보고의 으뜸가는 부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