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운경 ()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장로회 총회 서기,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한 목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4년(고종 31) 10월 13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평안남도 강동
관련 사건
신사참배 거부운동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장로회 총회 서기,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한 목사.
생애 및 활동사항

1894년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했다. 1905년 기독교에 입교, 1911년 숭실학교 졸업, 1912년 4월 세례를 받았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0년 6월 동아일보 평양지국 강동분국장으로 활동했으며, 1921년 5월 강동군 강동읍교회 장로, 이해 12월부터 1925년 11월까지 강동읍교회와 성천읍교회 조사, 1930년 10월까지 담임으로 활동했다. 1924년 6월 장로교 평양노회 서기로 피선되었고, 1926년 4월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9년 9월 장로회 서기, 10월 평양노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30년 9월 장로회 총회 서기를 맡았으며, 1930년 10월부터 1936년까지 강동읍교회와 황주읍교회 담임을 했다.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장로회 총회 회계를 맡았고, 1936년부터 해방 때까지 강동읍교회 담임으로 활동했다. 1937년 평양 숭실학교학부형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8년 5월 말부터 6월 초 평양노회 대표로 일본시찰을 한 후 기독교계의 신사참배를 적극 지지했다. 1939년 12월 평양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를 면직할 때 참여했으며, 1940년 주기철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평양 산성현교회를 폐회할 때 수습위원으로 참여했다. 1940년 3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양노회지맹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이후 국민총력연맹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연맹 이사장이 되었다. 이해 12월 기원 2600년 붕축 신도대회를 개최할 때 대회장을 맡았다.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설립을 위한 교파합동위원 장로교 측 대표를 지내는 등 친일적 성향을 보였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3, (민족문제연구소, 2009)
『평양노회사』(1990)
『한국기독교사』(이영헌, 컨콜디아사, 1985)
『한국교회순교사(韓國敎會殉敎史)와 그 설교집(說敎集)』(김인서, 신앙생활사, 1962)
『야소교장로회연감』(1940)
『장로회보』(1940.4.10·1941.1.8·8.13)
『기독신보』(1938.7.5)
『조선일보』(1937.1.30·1.31)
『시대일보』(1924.6.13)
『동아일보』(1920.6.28·7.19·7.21·1921.5.2)
『중외일보』(1919.9.8)
집필자
성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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