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원가제조(司譯院假提調)를 거쳐 통사(通事)가 되었다. 통사란 조선시대의 역관(譯官)의 하나로서 4도목취재(四都目取才)에서 상등(上等)으로 합격한 사람을 말하나 외국에 나가는 사행에 따라가는 통역관을 통칭하기도 하였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왕위찬탈에 공헌한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조선시대의 역관은 정3품 당하관이 승진의 한계였으나, 그는 통사의 신분으로 20여 번 북경을 드나든 공로로 1469년(예종 1)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1474년(성종 5) 관압사(管押使)로 중국을 다녀왔다. 1476년 어전통사(御前通事)가 되었으며, 1480년에는 어전에서 통사하기 때문에 특별히 종2품 가선대부 용양위사과(龍驤衛司果)로 승진하였다.
그동안 역관으로서 2품에 승진한 자는 세종 조에 김청(金聽) 한 사람뿐이었고, 세조대에는 이흥덕(李興德)과 이유례(李有禮) 두 사람뿐이었다. 1483년(성종 14)에는 정조부사(正朝副使)로 중국을 다녀왔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여러 차례 중국을 드나들면서 밀무역을 부업으로 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