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행정의 연구영역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되어 있지 않다. 즉, 공무원이 자금을 합법적·능률적으로 사용하도록 보장하려는 목적을 가진 작용(협의)으로 파악할 때에는 그것은 예산의 편성·심의·집행, 회계의 기록과 검사(감사)에 한정되며 재무관리와 같은 의미를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정책적인 개념(광의)으로 파악하면 경제정책, 공채정책, 수입·지출 정책 등 재정정책까지도 포괄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늘날에는 재무관리와 재정정책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근대적인 의미의 예산제도가 없었으나 조세와 감사제도는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① 고구려:지방의 성주(城主)들이 조세를 거두었고 자유농민에게 호세(戶稅)와 인두세(人頭稅)를 부과하였는데 율령시행으로 수조제도가 채택되면서부터는 농민을 고려한 구제책으로 진대법(賑貸法)이 시행되었다.
② 백제:육좌평(六佐平) 중 내두(內頭:庫藏)가 재무를 관장하였다. ③ 신라:중시(中侍, 후에는 侍中) 밑에 창부(倉部)가 있어서 재무행정을 담당하였다.
④ 고려:공부(貢賦)·전량(錢粮)을 관장하는 호부(戶部)를 두었으며, 조세는 일반 농민이나 예민층이 전지를 빌려 경작함으로써 국가나 개인에게 부과하였고, 전조(田租)·세공 및 기타 잡세를 관에 바쳐야 하였다.
1023년(현종 14) 의창수렴법(義倉收斂法)을 제정하여 일정한 전조를 징수, 저축하게 하고 흉년에 이를 대여한 다음 추수기에 상환토록 하였다. 몽고의 지배하에서는 재무행정기관인 호부가 판도사(版圖司)로 개칭되기도 하였다.
⑤ 조선:재무행정조직으로 호구·조세 등을 관장하는 호조와 백관을 규찰하는 사헌부를 두었으며, 호조는 조선 말기에 탁지부로 개편되었다. 호조는 반급된 전(田)에서 조세를 징수하였는데 조(租)는 소작료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제가 점차로 문란해짐에 따라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으며 토산물 공납의 폐해가 극심해졌다. 그 반면에 면세지·진전(陳田) 등이 늘어나 국가재정은 궁핍해졌다.
이러한 재정의 곤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광해군 때에는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미곡을 징수하는 관아로서 선혜청을 두었다. 그 결과 국가수입은 증대되었으나 공부법(貢賦法)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국가재정은 농민에 대한 봉건적인 착취에 의해서만 확보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의창·사창을 두어 빈민구제의 기능을 수행하게 하고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조절을 도모하도록 하였으나 뒤에는 고금리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종 때에는 경복궁의 중건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결두전(結頭錢)·문세(門稅)·원납전(願納錢) 등 각종 세금과 기부금을 받았으며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여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1894년(고종 31) 6월 중앙관제개혁안이 군국기무처에 상정되어 가결되었는데, 이는 개혁파가 『대전회통』·『육전조례』와 일본의 법전을 참조하여 기초한 것이었다.
8개 아문 중 탁지아문은 호조를 계승하여 설치된 재무행정조직으로서 총무국·주세국(主稅局)·출납국·국채국·은행국·회계국 등의 보조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정기구의 개혁과 병행하여 재정개혁도 단행되었다. 그 이유는 종래의 재정이 무계획적·비조직적이었으며 가혹한 세율과 불법적인 중간수탈, 양출위입(量出爲入)의 예산 등 그 폐해가 허다하여 국가재정의 문란과 백성의 생활파탄이라는 악순환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재정의 일원화, 세법의 확정, 예산제도의 확립 등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제1차 개혁을 통하여 탁지아문이 전국의 재정·양계(量計)·출납·조세·국채·화폐 등 일체를 총괄하고, 각 지방의 재정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종래 궁내부의 각 궁(宮)·사(司)에 응입(應入)하던 전곡을 탁지아문이 전관하며 일체의 경비를 왕실에 지출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탁지아문을 중심으로 하는 재무행정기구의 일원화가 이루어졌고 각부 아문(各府衙門)에 신설되어 그 기관의 회계·예산·결산 등을 관장하는 회계국을 지휘, 감독하게 되었다. 이러한 재무행정기구의 일원화는 1894년 7월 그때까지 쌀·태(太)·포·목 등으로 수납하던 모든 세금을 금납제(金納制)로 대치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다.
비록 당시에 회계검사기구가 미비하였고 예산집행의 적정 여부를 심사하는 방법이 확립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일원화는 재무행정의 근대화를 도모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제2차 개혁에서는 탁지부관제가 개편되었는데, 그것은 회계법이 제정되고 근대적인 예산제도가 새로이 채택됨에 따라 합리적인 재무행정조직을 구성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즉, 개편된 탁지부 사계국(司計局)은 예산·결산에 관한 사무, 보험회사의 회계감독, 은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고, 출납국은 국고에 속한 현금 및 물품의 관리·출납, 경비·지출의 집행 등을 분장하였다.
탁지부는 재무행정기구로서 예산 및 재정을 관장하였고, 특히 1895년「회계법」의 공포와 더불어 재무행정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1차 개혁에 의하여 일원화된 재무행정조직은 왕실의 반발로 제2차 개혁에 의하여 다시 이원화되고 말았다.
내각의 탁지부 외에 궁내부에 회계원을 설치하여 왕실의 재산·결산의 보고, 재무검사와 보관, 출납현금의 사무를 장리하게 함으로써 왕실재정이 분리된 것이다. 탁지부와 회계원에 의한 재무행정조직의 이원화는 재무행정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1895년 3월 세무감독을 담당하는 관세사와 수세사무를 관장하는 징세서를 설치하였다. 전국에 9개의 관세사를 설치하여 관세사장·관세주사를 배치하였으며, 220개 소에 징세서(후에는 세무서)를 설치하여 징세서장(후에 세무서장)·징세주사를 배치하였다.
관세사와 징세서는 탁지대신의 지휘·감독을 받아 조세 및 기타 세입의 징수를 관장하였다. 또한 1895년 4월부터 「회계법」이 시행됨으로써 재무행정의 절차가 규정되었으며, 예산일년주의(예산한정성의 원칙)가 채택되었다.
1895년 3월「회계법」이 공포된 데 이어 수입조규(收入條規)와 지출조규(支出條規)가 칙령으로 제정되었다. 이 「회계법」에 따라 1896년 세입세출예산안이 편성되었다. 비록 그것은 의회의 심의·의결을 거친 근대민주주의적인 예산은 아니었지만 재무행정의 발달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왕실재정이 강화된 반면 정부재정은 도리어 약화되었으며, 왕실재정을 관장한 궁내부 내장사(內藏司)는 1899년내장원(內藏院)으로 개편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와 더불어 설치된 조선총독부에는 재무행정조직으로서 탁지부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3·1운동 직후 총독부 관제를 개혁하여 재무국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특별회계에 관한 건」과 「조선총독부특별회계규칙」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전문 11조 부칙으로 된 짧은 것이었고, 이 회계규칙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일본의 회계규칙을 준용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일본의 예산회계제도가 그대로 우리 나라에 적용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특수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이 실시된 초기에는 조선총독부 행정기구를 그대로 존속시켜 재무국을 두었으나, 1946년 3월 국제(局制)를 부제(部制)로 개편함에 따라 재무부로 승격되었다.
또한 관방(官房)의 과를 처로 승격, 개편함으로써 관재처가 설치되었다. 한편 군정 당국은 미육군성의 예산·회계 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 실시하였으나 예산·회계에 관한 기본법을 제정하지 않고 일제 치하에서 시행되던 예산회계법령을 답습하여 적용하였으므로 재무행정의 관점에서는 일본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었다.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미군정장관과 한국인 민정장관의 공동명의로 된 ‘재무부보(財務部報, Memorandum)’ 형식의 통첩이 시달되어 주로 이에 의거하여 회계사무를 처리하였다. 또한 각 행정기관이 예산요구서를 작성하여 재무부 사계국에 제출하면 사계국은 예산요구액을 분석, 사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끝나면 예산안은 중앙경제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군정장관의 승인을 얻음으로써 확정되었는데,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이 설치된 뒤에는 중앙경제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다음 입법의원의 심의도 거치게 되었다.
1948년 제정된 「헌법」에는 행정부예산제도를 채택하여 예산안제출권을 행정부에 부여하는 한편, 국회로 하여금 예산을 심의함에 있어 지출예산 각 항목의 금액을 증액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의회정에 입각한 민주주의에 입각한 예산제도 이외에도 조세법률주의, 국회의 결산심사권·기채동의권, 대통령의 긴급재정처분에 대한 승인권, 회계검사제도 등을 「헌법」에 규정함으로써 근대적 재무행정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1948년 7월 17일「정부조직법」 이 공포됨에 따라 재무행정조직으로는 기획처 예산국, 경제위원회, 재무부 및 심계원이 설치되었다.
1948년「국회법」의 제정으로 재정경제위원회는 예산안을 종합심사한 뒤 본회의에 보고하여 이를 의결하게 되었으나, 1953년「국회법」이 개정되어 신설된 예산결산위원회가 예산안의 종합 심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1951년 재무행정에 관한 기본법인 「재정법」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각계의 의견을 종합하여 성안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재정법과 회계법을 거의 모방한 것이었다.
정부는 1957년도 예산부터 재분류사업에 착수하였으며, 1962년도까지는 세출예산을 일반적 경비, 사회적 경비, 경제적 경비, 기타 경비로 구분하였다.
이 분류는 정부재정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1961년 예산국의 주관하에 기업회계제도를 채택하려고 노력한 결과 교통사업·통신사업·전매사업의 「특별회계임시조치법」이 각각 제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1년 재무부에 설치된 재정회계제도개혁위원회의 안을 기초로 「예산회계법」·「기업예산회계법」이 제정되었으며, 1962년「정부투자기관예산회계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1961년 7월「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건설부를 폐지하고 경제기획원을 신설하였으며, 예산국을 재무부에서 경제기획원으로, 외자청을 건설부에서 재무부 외청으로 각각 이관하였다.
1962∼1963년도 일부 부처(건설부·농림부·보건사회부 등)의 일부 사업에 성과주의예산제도를 채택하였으나 충분한 사전준비와 예비검토를 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가지 난제에 봉착하여 1964년 이를 폐기하고 말았다.
1969년 경제기획원은 계획예산제도(PPBS)의 도입 가능성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국방부 특명검열단(特命檢閱團)은 2차에 걸쳐 계획예산제도의 도입을 위한 구체적 시안을 마련하여 1971년과 1973년에 각각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체신부도 계획예산제도의 도입을 위한 2차의 시안을 마련하였으나 결국 채택되지 못하였다. 1982년 이래 정부는 영기준예산제도(零基準 豫算制度, zero-base budgeting)를 채택, 실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착되지 못하였다. 1987년 여소야대의 국회가 구성됨으로써 경제과학위원회가 주도가 되어 국회의 국정조사·감사권을 부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① 예비비 하한선의 삭제, ② 국회의 공공요금 결정에 참여, ③ 예산통일의 원칙 강화, ④ 예산안의 국회 조기 제출, ⑤ 수의계약 범위의 축소 등으로 요약된다.
재무행정의 가장 기본이 되는 법은 「예산회계법」과 「국세기본법」으로, 「예산회계법」은 예산·결산·수입·지출·계약, 국고금과 유가증권, 출납공무원, 기록과 보고 등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한편 재무행정기관으로는 기획재정부(옛 재정경제부|재정경제원, 예산·세입징수·지출·회계·결산·재산관리·국고 등)·감사원(회계검사)·조달청(구매·공급·관리 등)·국세청·관세청이 있다.
1979년 6월 경제기획원 직제가 전면 개정됨에 따라 예산국이 폐지되고 예산실이 신설되었으며, 1994년 12월「정부조직법」의 개정에 따라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되었고, 1998년 재정경제부, 2008년 기획재정부로 변천하였다. 감사원은 원장을 포함하는 7인의 감사위원으로 구성된 감사위원회의와 사무처로 조직되어 있다.
이와 같이 감사원을 이원조직으로 한 이유는 감사원이 준사법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판단의 신중과 공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검사기능과 판단기능을 분리하고 전자는 사무처에, 후자는 감사위원회의에 각각 부여하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