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년(고종 4) 북계분도장군(北界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황기자군(黃旗子軍)에게 패하여 의주로 도망쳐온 금나라 원수 우가하(于哥下)의 요청으로 그를 보호하였다.
이듬해 황기자군 가유(賈裕)가 대부영(大夫營)에 둔을 치고 만나라고 요청하니 압록강 빈관(賓館)으로 초대하여 술에 취하게 한 뒤 가유 등 7인을 사로잡고 20여 인을 참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우가하가 친히 정공수를 찾아와서 감사함을 표하고 화친을 요청하였다.
1219년(고종 6) 의주(義州)의 별장(別將) 한순(韓恂)과 낭장(郎將) 다지(多智) 등이 난을 일으키고 방수장군(防戍將軍) 조선(趙宣)과 의주의 수령(守令) 이체(李棣) 등을 죽였다. 조정에서 장군(將軍) 조염경(趙廉卿)을 의주선유사(義州宣諭使)로 파견하니, 한순과 다지의 무리 50여 명이 난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병마사(兵馬使) 조충(趙冲)·김군수(金君綏)·정공수 등은 청렴결백하고 민(民)들을 사랑하였습니다만 나머지는 모두 탐오하고 잔학하여 민들에게서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226년 추밀원부사 상서우복야가 되었다.
이듬해 추밀원사로서 중군병마사가 되어 상장군 조염경과 함께 정주(定州)·장주(長州) 등지에 침입한 동여진을 방어하였으나, 이듬해 패전을 이유로 남경유수로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