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자거(子居). 호는 추재(追齋)·토곡(土谷). 정숙(鄭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종영(鄭宗榮)이고, 아버지는 정약(鄭爚)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11년(광해군 3) 주서가 되고, 1613년(광해군 5) 예조좌랑·사서·병조좌랑을 거쳐 1618년(광해군 10)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를 역임하였고, 이어 장령·사간·나주목사를 거쳐 1627년(인조 5) 동래부사로 부임하여서는 왜(倭)와의 사사로운 무역을 금할 것을 청하였다.
1629년(인조 7) 좌부승지, 이듬해 참찬관을 역임하고 1631년(인조 9) 형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634년(인조 12) 8월 당시 토지의 경계가 바르지 않아 공부(貢賦)가 균등하지 않고, 세력이 있거나 간사한 자들이 겸병하여 서민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삼남(三南)지방에 양전(量田: 토지측량) 사업을 실시함에 충청도 양전사(量田使)로 파견되었으나 양전을 할 때 빠진 결수를 남김없이 찾아내어 더욱 각박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1636년(인조 14) 우승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