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설화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유형에 따라 사기담 · 경쟁담 또는 음담패설로 분류될 수도 있으나, 포괄적으로 보아 소화(笑話)나 골계담(滑稽談)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화는 정만서의 출생지인 경주시 인근 일대에 널리 전승되고 있으며, 이 지역과 교류가 있는 경상북도 남동부 지역 일대에도 다수 전승되고 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80편 가량 채록되었다.
정만서는 경주시 건천면 출생이며 용명2리에 무덤이 있다. 비문에 의하면, 그는 동래 정씨이고 이름은 용서(鄭容瑞), 자는 만서(萬瑞), 호는 춘강(春岡)이다. 1872년(고종 9)에 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896년 61세로 죽은 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그는 일생을 평민과 더불어 살면서 부자와 관료들의 횡포에 맞서고 풍류와 임기응변의 재치로 생활의 방편을 삼는가 하면, 삶과 죽음 등 근원적인 문제를 자각시켜 주는 일화도 많이 남겼다. 다음은 정만서에 관한 일화이다.
정만서가 곶감을 보고 “이거 국 끓여 먹으면 되지요?”라고 하자 곶감 장사가 “곶감을 어찌 국 끓여 먹나, 그저 먹지.”라고 대답한다. 정만서가 곶감을 실컷 먹자 장사가 돈을 내라고 하는데, 정만서는 곶감 장사에게 “그저 먹으라고 했으면서 왜 돈을 달라하느냐?”라고 대꾸한다.
이러한 말장난은 기생에게 거문고를 사주겠다고 돈을 받은 후 ‘검은 거’라며 시커먼 방앗공이를 건넨 이야기나, 아들 범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어떤 포수가 범을 잡았느냐고 농담한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하루는 정만서가 대구 서문시장에 나타나서 땅을 치며 종일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는다! 그것이 슬퍼서 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연유를 캐어물으니 “여기 늙어서 죽지 않을 사람 누가 있느냐?”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크게 놀라며 모두들 웃고 헤어졌다 한다.
어느 날은 정만서가 객지에서 복막염으로 죽을 고비에 이르자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아비를 모시러 왔다. 배가 부어서 아들 등에 등을 대고 업히어 오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걱정스레 안부를 물으니 “등 따시고 배부른데, 이보다 더 좋은 팔자가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임종 직전에 친구들이 찾아와서 죽음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아직 초죽음이라서 죽어 봐야 알겠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설화의 내용은 상당히 지적인 언변과 단수 높은 기지와 비약적인 논리로 이루어져 있어서,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조선 후기 건달형 인물들 중 정만서는 언어의 모호성을 활용하여 자유롭게 거짓말을 한다거나, 전복적인 상상을 통해 부정적 상황을 역전시키는 파격적인 인물이란 특징이 있다.
방학중과 거의 동시대 사람이면서 비슷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인물전설(人物傳說)이 상호 관련성 속에 고찰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지배와 억압의 대상에게 어떻게 대항하며 민중적 의지를 실현해 왔는가 하는 문제도 이 설화들을 통해서 다루어질 수 있다. 또한 문학으로서의 골계적 · 풍자적 양식에 대한 논의 뿐만 아니라, 민중적 지성 또는 민중적 영웅의 인물 유형을 분석함으로써 종래의 서사 문학에서 존재하던 미적 범주나 인물 유형의 성격이 어떻게 계승되고 변용되어 왔는가 하는 논의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