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돈보(敦夫). 정재대(鄭載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욱선(鄭勗先)이고, 아버지는 정석행(鄭錫行)이다. 어머니는 이징해(李徵海)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정언(正言)·승지·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755년 홍문관에 근무하면서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주청하였다. 1756에는 경기어사로 파견되어 그 곳의 실정을 살피고서 금도(禁屠: 밀도살 금지)·결역(結役: 경저리·영저리 등에게 주는 급교), 대동 상납, 수어청 아병(牙兵)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 해 또 영남 지역으로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서는 여러 지역 수령들의 공과를 보고하였다.
1763년 통신사(通信使)에 임명되었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사양하다가 김해로 유배갔다. 1765년 이조참의를 지내고, 이듬해에는 대사성·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68년에는 강화유수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7만여 석에서 3만 8천 석으로 축소된 군량미에 대한 대처 방안을 강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대사헌·도승지·동의금(同義禁), 이조참판, 동경연(同經筵)을 지냈으며, 1770년에는 예조참판을 지냈다. 1774년에는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이 해 함경도 별시의 시관(試官)이 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에는 빈전도감(殯殿都監) 제조(提調)로 활동했으며, 예조판서를 지냈고,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그 해 악기도감(樂器都監) 제조(提調)로서 경모궁(景慕宮)에 악기를 설치하는 데에 힘썼다.
1777년(정조 1)에 청나라의 황태후가 죽자 진위 겸 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파견되었으며, 청나라에서 돌아와서는 판윤으로서 활동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유명무실한 내시교관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1779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어 이듬해에는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781년에는 호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좌참찬· 예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예조판서 시절에는 외읍에서 거행하는 포제(酺祭: 메뚜기 등 농작물의 곤충해가 심할 때 지내는 제사)의 격식을 통일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1784년에는 수어사, 이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광주(廣州) 결전(結錢)의 규정 확립을 주장하였다. 또 조군(漕軍)의 기만과 지방관들의 이에 대한 관리 소홀을 철저히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듬해에는 판윤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