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중급(仲及). 정광겸(鄭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창유(鄭昌兪)이고, 아버지는 정원시(鄭元始)이며, 어머니는 윤원동(尹遠東)의 딸이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93년에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다가 상토첨사(上土僉事)로 발령받았다. 그 해 서장관으로서 중국에 다녀와서는 중국의 극심한 흉년과 중국황실의 사정과 각노(閣老) 화곤(和困)의 막강한 권세 등에 대해 보고하였다.
1797년에는 동래부사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서양인이 유리병·천리경·무공은전(無孔銀錢)을 가지고 일본의 나가사끼를 출발하여 용당포(龍塘浦)에 표류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1799년에는 이조참의와 승지를 역임하였다. 1808년(순조 8)에는 강원도관찰사를 지냈고, 1810년에는 대사간·대사헌을 거쳤으며, 1813년에는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815년에는 함경도 도과(道科)의 시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혜경궁(惠慶宮)이 경춘전(景春殿)에서 서거하자 빈궁(殯宮)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1816년에는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이조판서·좌참찬을 역임했다. 1818년에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지냈다.
1821년에는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 1822년에는 함경감사의 직책을 수행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며, 1824년에는 좌빈객에 임명되었고, 1826년에는 좌부빈객·판돈령부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