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金浦) 정씨(鄭氏)의 시조이다.
1126년(인종 4) 이후(李侯)와 함께 사신으로 금나라에 가서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돌아왔다. 1128년 남계(南界)에 해적이 일어나자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선무사(宣撫使)가 되어 현지에 파견되었다.
명진(溟珍)·송변(松邊)·아주(鵝州)의 해적 좌성(佐成) 등 820여 명이 투항하자 합주(陜州) 삼기현(三岐縣)에 귀원장(歸原場)·취안장(就安場), 진주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설치하여 안주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