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겸(子謙), 호는 회와(晦窩). 정양(鄭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보연(鄭普衍)이고, 아버지는 정천(鄭洊)이며, 어머니는 심약명(沈若溟)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영조 3)에 검열(檢閱)에 재직하면서 『숙종실록』의 개수를 반대하였다. 1728년에는 지평(持平)을 지냈다. 이듬해에는 별겸춘추(別兼春秋)로 활동하면서 상신(相臣: 영의정, 좌·우의정의 총칭)들이 배척받은 자를 제외하고는 등용하게 되어 있는 관례를 무시하고 천거자 모두를 등용하지 않은 행동을 비판하였다.
1730년에는 지평(持平)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대사간 홍현보(洪鉉輔)의 상소를 물리친 영조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1731년에는 충원현감(忠原縣監)을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탐관오리라는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영조가 이것을 무시해 버렸다.
1735년에는 의주부윤을 역임했으며, 이듬해에는 사서(司書)를 지냈다. 1739년에는 경상도관찰사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제언을 묻어 농토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741년에는 무신란(戊申亂)에 공이 있는 고(故) 감사 황선(黃璿)의 사당을 인정해주고 면세전 10결을 하사하여 그것을 수호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영조의 허가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그 해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1744년에는 가자(加資)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예조참판, 도승지·대사헌, 형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8년에는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함경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기근 타개책으로서 영남지역의 곡식 수송을 제시하였다. 1751년에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으며, 1755년에는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