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우의정, 좌의정, 중추부영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얻지 못해, 형 태화의 막내아들 정재륜(鄭載崙)을 입양했는데, 이가 효종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 사돈 관계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8년 충청도암행어사로, 이듬해는 함경도암행어사로, 1641년 황해도암행어사로 각 도정(道政)을 염찰(廉察)하였다. 1640년에는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 때 세자가 서양 문물을 완호(玩好)하는 것을 크게 북돋운 것으로 전한다.
1645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소위 강옥(姜獄: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에게 죽음을 내린 사건) 때 패초(牌招)를 올리지 않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리하여 1년 반 동안 폐고(廢錮)되어 있다가 1647년 말에 평안도관찰사로 승진, 기용되었다.
평양에 부임한 지 1년 반 만에 아버지의 병으로 잠시 사직했다가, 1650년(효종 1)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뒤이어 경기도관찰사·도승지·강화부유수를 거쳐 165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667년(현종 8) 우의정이 되기까지 10년 동안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두루 역임하면서, 1660년과 1664년 동지사(冬至使)로 두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정책 대결이 표면화되었던 때여서 중도적 노선을 지키고자 했던 그와 그의 일문(一門)에게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무려 5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겪다가, 형 정태화가 영의정을 내놓고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으면서 우의정 겸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우의정에 오른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 형 정태화가 영의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중추부판사로 물러났다. 1677년 9월 중추부영사로서 죽었다.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중도적 노선을 견지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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