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7년 8월 반항적인 건주좌위의 추장 동산(董山)을 살해한 명나라가 일거에 모든 여진 세력을 누를 목적에서 9월에 5만명의 토벌군으로 원정해 올린 전과를 ‘성화(成化) 3년의 역(役)’이라 한다. 동시에 조선군도 큰 전과를 세워 정해서정이라 한다.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는 임무를 띤 명나라의 요동백호 백옹(白顒)은 두 나라의 전통적 관계 위에서 명나라의 토벌계획을 알려 조선의 출병을 종용하였다. 명군이 9월 23일 요동을 출발하여 27일 건주여진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듣고 조선도 27일 1만명의 정예군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백옹은 조선군이 파저강(婆猪江)으로 침공하면 명군이 파저강에 도착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에서 침공날짜를 29일로 연기할 것을 다시 조선에 제의해오자 조선은 이를 수락하였다.
강순(康純)을 정벌군의 주장(主將), 어유소(魚有沼)와 남이(南怡)를 대장으로 한 1만 명의 조선군은 명군을 도와서 전투하는 형식으로 출정하였다. 좌참찬 윤필상(尹弼商)의 첫 보고에 따르면, 강순과 남이가 이끈 정벌군은 9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25일 어유소가 거느린 정벌군과 황성평(皇城平)에서 만나 27일 두 길로 진공하였다.
10월 10일 강순이 승정원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9월 26일 강순과 남이는 만포진에서 파저강으로 들어가 이만주(李滿住)와 고납합두리(古納哈豆里)의 아들 보라충(甫羅充) 등 24명을 죽이고 이만주와 고납합두리의 처자 및 부녀 24명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중국남자 1명, 여자 5명에다 소·말·기계·병장(兵仗) 등을 노획한 동시에 이들의 집과 곡식을 불사른 뒤, 명군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10월 2일 철수해 3일 압록강을 건넜다.
한편, 어유소는 고사리(高沙里)에서 올미부(兀彌府)로 들어가 21명을 참수, 50명을 사살하고 중국 여자 1명, 각종 기계, 소·말 등을 노획, 집 97채를 소각했으나 명군은 만나지 못하였다. 정벌에서 얻은 가장 큰 전과는 건주위의 추장 이만주를 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