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齋). 아버지는 합천군수 조경망(趙景望)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유식(柳寔)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94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어 공조·호조의 낭관, 제용감·군자감의 판관, 장악원정 등을 지냈다. 지방으로 나가서는 강서현령·평양서윤·광산현감·안악군수, 청송·성천의 부사, 나주·능주·청주·양주·상주의 목사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었고, 이어 영변으로 이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수원부사·충청도관찰사·호조참의·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경연에서 ‘알인욕(遏人慾)·존천리(存天理)’의 설을 반복하여 아뢰니, 임금이 경청하고 호피(虎皮)를 특사하였다.
1735년 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 및 공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있었고,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희조(李喜朝) 등과 친교가 깊었다. 저서로는 『오재집(寤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