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인지(麟之). 조계원(趙啓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가석(趙嘉錫)이고, 아버지는 조태억(趙泰億)이며, 어머니는 심구서(沈龜瑞)의 딸이다.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정언(正言)의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홍문록(弘文錄) 15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었다. 1724년에는 지평(持平)과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 해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였는데, 이 때 그는 부교리·교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뒤 이듬해는 1725년에는 정언(正言)으로 활동하다가 처벌되기도 하였다. 이어 1727년에는 이조좌랑·교서관교리, 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병조참의(兵曹參義)를 역임하였고, 양서안무사(兩西按撫使)로 파견, 근무하면서 역적 이사성(李思晟)이 창설한 군제를 영구히 폐지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대사간에 임명되어 언론의 흐름을 주도하였으며, 대사성을 역임하면서 성균관의 업무를 총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