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관지(寬之). 조재행(趙載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종진(趙宗鎭)이고, 아버지는 조운기(趙雲紀)이며, 어머니는 임득호(林得浩)의 딸이다.
1800년(정조 24)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1803년(순조 3) 홍문록(弘文錄) 3점(三點) 21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었다. 그 뒤 1806년 교리(校理)를 역임하면서 불순한 행동을 한 신하를 비판하기도 하였고, 시독관(侍讀官)으로서 『국조보감(國朝寶鑑)』 제3권을 임금과 강독하는 과정에서 언로개방의 중요성을 피력함과 동시에 옛부터 군주의 공사(公私) 분간의 불분명성을 비판하였다.
이어 1809년에는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재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호남지역의 광범위한 흉년 실상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초를 상세히 보고하였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세금 감면 및 인근 고을로부터의 곡식 수송 등을 제시하였다.
1818년에는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서 활동하였다. 1821년에는 동궁 행례(行禮)시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어 1824년에는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 뒤 1827년과 1828년에는 대사간으로서 언론 활동을 총지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