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본래 청룡산기슭 한 골짜기에 있다가 임진왜란 이후 현 위치로 옮겨졌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대성전·동무(東廡)·서무(西廡)·동재(東齋)·서재(西齋)·명륜당·신문(神門)·홍전문(紅箭門) 등이 있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과 동무·서무에 우리 나라 18현 및 중국 94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축형태는 앞은 명륜당을 두고 대성전을 뒤에 뒤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비탈면을 잘 이용하였고, 계단을 올라 삼문을 통해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마주 서 있다. 마당을 지나면 그보다 높은 곳에 대성전이 있다. 14개의 흘림기둥 위에는 2익공두공이 얹어져있으며 지붕의 양쪽 박공판 아래에는 풍판이 대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여왔다. 1950년대 이후의 사항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