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해군(蒼海郡)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위씨조선(衛氏朝鮮)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꾀하여오던 중, 서기전 128년에 예맥(穢貊)의 군장 남려(南閭) 등이 28만인의 호적을 가지고 요동군(遼東郡)에 투항하여오자, 이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위씨조선에 대한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하여서는 함경남도 영흥으로 보는 설이 있으나, 뒷날 현도군(玄菟郡)이 설치된 압록강 중류의 통구(通溝)지방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무제는 창해군 지배를 실질화하기 위하여 팽오(彭吳)로 하여금 요동군에서 이곳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게 하였는데, 공사가 예상 밖으로 곤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2년 뒤인 서기전 126년에 공손홍(公孫弘)의 중지건의를 받아들여 군을 폐지하였다.
이 때 무제가 창해군 설치를 포기한 것에는 이밖에도 교통로 개척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연(燕)·제(齊)지방의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데에도 한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