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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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인물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독립 제5대대 제22중대 3소대 분대장으로 안동지구전투에 참전한 군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9년 11월 13일
사망 연도
1951년 4월 25일
출생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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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독립 제5대대 제22중대 3소대 분대장으로 안동지구전투에 참전한 군인.
내용

군번 8112421.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출생.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독립 제5대대 제22중대 3소대 분대장으로서 참전하여, 안동지구전투에서 공훈을 세우고, 1951년 4월 25일 개풍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경북 안동시 남선면 정하동에 집결한 해병 독립 제5대대는 1951년 1월 24일 미 해병 제1연대와 예비대로서 안동과 이 지역 내에 군사시설을 경계하고, 안동과 대구 간의 보급로를 확보하면서 지역 내에서 함부로 날뛰는 적을 격멸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에 천춘식 3등병조가 소속되어 있는 제21중대(중대장 朴利稷 중위)는 대대장에게서 정하동에 진지를 구축하고 지정하는 지역을 정찰하면서 수시로 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중대는 다음 날인 1월 26일부터 소대 규모로서 안동시 임하면을 중심으로 적의 출몰 예상지역을 집중적으로 수색정찰하였으나 아무런 조우상황(遭遇狀況)도 없었다.

다음날 제23중대가 정찰중에 200명 규모의 적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대대장은, 제21중대와 화기중대의 1개 소대로 출동부대를 편성하고, 다음날인 29일 새벽에 출동시켰다.

제21중대는 추목동에 도착한 직후, 적의 공격을 받았다. 40여 분에 걸친 교전 끝에 중대는 5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270고지를 점령하고는 다음 날 정하동으로 복귀하였다. 2월 1일 10시 30분, 300명 규모의 적이 풍천면 광덕동에서 약탈을 자행하며 주둔해 있다는 첩보에 따라 그 지역으로 출동하였다.

2월 2일 중대장은 2개 소대로 신계동과 정자동 일대를 정찰하기로 하고, 제3소대에게 7시 20분에 정자동을 수색정찰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3소대는 수색정찰 중에 적 1명을 생포하여 적 250명이 인근 야산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적이 집결해 있는 야산을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 때 소대의 선두에서 1분대를 지휘한 천 3등병조는 경기관총의 지원사격을 받으면서 백병전을 벌였으며, 종횡무진 총검술을 발휘하여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격전을 벌인 끝에 적 사살 30명, 포로 11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1953년 12월 22일 충무무공훈장(忠武武功勳章)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사』 6(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76)
『호국용사 100선』(이원복, 1979)
『호국의 별』 6(국방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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