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필사본.
청구(靑邱)는 이만도가 자결 순국한 곳인 청구동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만도는 1866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고관을 역임한 유학자로서 1910년 정2품 자헌대부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 후에는 어떤 관직에도 나가지 않고 고향인 경상북도 예안군(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하계리(下溪里)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이르러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청량산과 일월산 산중으로 들어가 한말 유학자로는 드물게 보는 고행을 결행하였다. 관직에 있던 사람으로서 국운이 쇠잔한데 대한 책임의 일단을 통감한 사죄의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광덕(廣德), 모암(某岩), 명동(明洞), 사동(思洞), 고림(高林) 등지의 선영 묘막에서 나쁜 옷과 음식으로 고행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전해 주는 가장 감동적인 내용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이만도가 그의 큰댁이 있는 율리(栗里) 청구동에 이르러 24일간의 단식과 끝내 자정 순국한 과정의 기록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할 당시에 유림이 보여준 태도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의병으로 봉기해 싸우는 길과 해외로 망명하는 길과 자정(自靖)으로 순국하는 길 등이었다. 그 때 이만도는 1895년에는 선성(宣城) 의병진을 일으켜 싸웠고, 1905년 을사조약을 맞아서는 고행 수도로 죄인을 자처했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자정 순국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자정자 가운데는 음독(飮毒), 도해(蹈海), 단식(斷食) 등의 방법들이 있었고 그 중에 단식의 경우에는 거의 두문하고 단식을 했다. 그런데 이만도는 방문객 모든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서 그런 가운데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단식을 고집한 독특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친구들과는 인생을 담론했고, 제자들에게는 경학을 강했고, 자식들에게는 가전(家傳)교훈을 강하며 자신의 사후 장사 문제까지 유언했다. 그리고 부녀자들에게는 부도를 강하며, 어린 손자들에게는 손을 잡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유학 원리를 강하면서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교훈을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심었다.
이 책은 사실의 요점만을 기록했지만, 문장의 행간과 글 뒤에 숨어있는 뜻을 생각하며 읽노라면 어느 교훈이 이 이상 가슴을 파고드는 경우가 있을 것인가 하고 감탄케 한다. 이만도의 문인 가운데 이중언(李中彦), 김도현(金道鉉) 처럼 스승의 길을 따라 자정한 지사와 독립운동자가 많았던 것도 청구 교훈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의 동생 만계(晩煃)와 아들 중업(中業)과 손자 동흠(棟欽), 종흠(棕欽)을 비롯해 집안에 독립운동자가 많았던 이유도 이 책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1911년 안동 유림이 대거 만주 서간도로 망명해 경학사와 신흥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군 기지를 개척할 때, 그의 중심 지도자가 아들 중업의 처남 김대락(金大洛)과 동서 이상룡(李相龍)과 이원일(李源一)이었다는 것도 이 책에서 전해 주는 감동적인 교훈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며느리 즉, 중업의 부인 김락(金洛)여사가 일제하에서 고문을 받아 실명을 당하면서까지 남편과 아들의 행적에 대해 함구했다는 것도 청구 교훈의 꽃다운 결실로 보아서 좋을 것이다.
이만도가 순국하기 사흘전인 9월 5일(음)에 일본 경찰이 찾아와 강제로 미음을 먹이려고 하자 혼수상태인줄 알았던 이만도가 벌떡 일어나 호령해 물리친, 소설 같은 이야기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에서도 자정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철인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이 책은 1910년 9월 8일 이만도가 순국한 뒤 이야기가 끝을 맺고 있다.
이 책의 고장인 청구동에는 해방후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響山李先生殉國遺墟碑)’가 정인보(鄭寅普)의 글과 김구(金九)의 글씨로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