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책. 목판본. 후손 종형(鍾瑩)·상효(相孝)·영일(永馹)·영인(永仁)·수찬(秀璨) 등이 편집, 간행했으며, 연대는 미상이다. 권두에 송병선(宋秉璿)·이만계(李晩煃)의 서문, 권말에 남병철(南秉哲)의 후서가 있다.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영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시 18수, 부(賦)·서(書) 각 2편, 발(跋) 1편, 제문 3편, 묘지 1편, 잡저 12편, 부록 1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잡저의 「용사일기(龍蛇日記)」가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이 글은 1592년 4월 14일부터 1595년 3월 20일까지 임진왜란의 실상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태조의 영정과 5성(五聖), 10철(十哲), 12현(十二賢)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면서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과 피난의 경과, 난리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예컨대 부산·동래·양산·언양·영천 등이 함락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정발(鄭撥)·송상현(宋象賢)·조영규(趙英珪) 등의 전사 사실을 서두에 기록하고 있다. 영남지방에서 일어난 격투장면을 자세히 기록한 반면, 중앙의 소식은 중요한 것만 부분적으로 기록하였다.
이 밖에도 난리의 틈을 타서 창고의 곡식을 훔친 사건, 군수물자 조달, 아군과 적군의 전사자 수, 의병활동, 민심을 안정시킨 일, 기후의 변화, 난리 중 공로가 있어 승진된 사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의 실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서의 「상천장서(上天將書)」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사들이 안강(安康)을 진압, 양좌동(良佐洞)에 들어가 병기를 준비하느라고 대나무를 베는 등 분탕이 심한 것을 보고 장수에게 그 사정을 아뢰어 시정해주기를 간청하는 내용이다.
논의 「주염계삼사왕안석론(周濂溪三辭王安石論)」은 왕안석이 주돈이(周敦頤)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으나, 주돈이가 학문의 성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사양하였던 사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글이다.